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정국에서 탄핵 사유에 대한 논쟁은 뜨거웠지만 행정과 국가운영 자체는 차분하게 이뤄졌다. 여야 모두 경제와 안보, 일상적인 행정에 대해서는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고 소추 당한 대통령들 역시 탄핵심판 외에 말을 아끼고 정치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대신 법적 대응에만 집중했다. 고건, 황교안 권한대행은 선거중립이나 국정농단 같은 탄핵 사유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인물이었기도 해서 ‘관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여러모로 악성이다. 일단 수사주체가 검찰, 경찰(국수본), 공수처 등으로 뒤섞여 혼선을 빚고 있다. 공수처가 수임기관이라 자임하고 있지만 수사역량, 권위면에선 제일 뒤쳐진다. 경찰의 경우 애초엔 검찰에 비해 정치적 책임성면의 우위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계엄 전후 수뇌부의 사전 인지와 윤 대통령으로부터 지시 하달, 현장 경찰의 국회 봉쇄 등이 한계다. 검찰은 수사 역량이나 계엄과 관련성 등에선 우위에 있지만 ‘검찰 정권’의 한 축이라는 비판, 그리고 다수 야당과 껄끄러운 관계 등이 한계다.
경쟁적 수사 진행이 결국 특검으로 수렴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지만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윤석열 대통령 측은 이런 난맥상을 악용하는 모양새다. 수사 기관 간의 경쟁, 교통정리가 정국의 피로도를 더 높이고 있는 셈.
권한대행의 위상 역시 마찬가지다. 한덕수 권한대행이 경제나 외교 분야에서 오랜 경력과 실적을 쌓고 요직을 다 거친 노련한 행정가임은 분명하다. 또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정무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하지만 현 정부 임기 처음부터 총리를 지낸 도의적 책임에 더해 계엄을 (반대했지만) 막지 못한 실질적 책임까지 지고 있다. 당일 행적과 관련해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한 대행이 볼 때 두 특검법은 구체적 내용 속에 문제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김건희’와 ‘내란’에 대한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평소에도 부담을 가중시키는 행위인데 현 정국에서는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한 대행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고 민주당도 문제되는 몇가지 조항에 대해선 손을 보는 식으로 우려를 낮추라고 조언하고 있다.
탄핵이 인용될 경우 조기 대선, 그리고 새 정부의 새출발 시기에 갈등 지수를 낮출 수 있는 측면에서 보자면 일리 있는 조언이지만 현재 여야의 상호 신뢰와 협상 수준을 보면 난망한 일이다. 한 대행도 이 이슈를 두고 여야의 협의와 조정을 기대했지만 무소용이었다.
만약 ‘한 대행의 거부권 행사->야당의 한 대행 탄핵’으로 이어진다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악의 연말연시를 맞이하게 되는 셈이다. 거부권 행사를 종용하고 있는 국민의힘은 야당의 무책임성을 부각하겠다는 속내 외엔 다른 복안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되면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는 것을 현실에서 확인할 것이고 민심의 대립은 극에 달할 것이다, 경제, 외교에 대한 악영향은 말할 것도 없다.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태도로 탄핵 심판과 수사에 임하고 있는 윤 대통령 역시 이 갈등의 틈을 더 벌리려 할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이 갈등은 앞으로 수개월 간 이어질 대행 체제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거대 양당과 대행 측의 협의, 조정기구가 필요성을 더 증폭시키고 있다. 연내엔 윤곽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