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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예속과 증오를 줄일 언어 정책 2024-04-16 11:43:04
말은 사람의 생각과 뜻을 주고받는 연장이다. 그 뜻이 모여 일을 만들고 학문을 세우고 미래를 그린다. 한 사람에게 말은 삶의 바탕이다. 먹고 누리고 느끼고 알고 깨닫는 거의 모든 일은 말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말은 사람을 사람답게, 사회를 사회답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이건범(thistiger@naver.com)
한글문화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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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예속과 증오의 말


누구든 태어나 자연스레 배우고 익히는 말이 가장 편하고 쓸모 있다. 우리말은 우리만의 것이기에 소중한 게 아니라 우리가 편하게 쓸 수 있기에 소중하다. 하지만 우리말임에도 너무 어려워서 편치 않은 말이 있고, 외국과 교류가 늘어나면서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는 외국어, 특히 영어 때문에 말글살이가 편치 않다. 어떤 이에게는 불편하지 않지만 어떤 이에게는 불편할 때 그런 언어 환경은 차별을 낳고, 어려운 말이나 외국어를 편하게 사용하는 이에게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매여 사는 상황을 빚는다. 물론 사회의 변화가 말에 영향을 미치므로 이런 언어 환경은 차별과 예속을 거리끼지 않는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언어 환경에서 차별과 예속이 굳어버리면 사회 공동체의 끈끈함도 떨어진다. 말이 차별과 예속을 부채질하면 사람들 말에 미움이 실려 곧 험하고 거칠어진다. 1990년대 자유화의 분위기 속에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구도가 사회를 뒤덮는 과정은 언어 권력인 영어가 우리말이 설 자리를 빼앗는 과정이었고, 그 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청소년의 욕설이나 인터넷 공간의 막말이 큰 문제로 떠올랐다. 모욕과 멸시가 말 속에서 나날이 커가고 있다.

사회를 고치지 않고 말만 다듬자는 주장은 헛되다. 하지만 말을 다듬어가려는 노력 역시 사회를 고치는 하나의 힘임을 인정해야 한다. 말은 생각의 거리를 좁혀 새로운 뜻을 모아내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차별과 예속과 증오를 줄일 수 있는 언어 정책은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에 주춧돌 노릇을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언어 환경


낱말, 문자 표기, 이야기, 학술, 언어교육의 다섯 가지 분야로 나누어 대한민국의 언어 환경을 살펴보자.

1. 낱말
영역을 가리지 않고 외국어, 특히 영어 낱말의 사용이 늘고 있다. ‘인터넷’이나 ‘디지털’처럼 새로운 문물과 함께 들어오는 신조어도 많지만, ‘팩트’, ‘프레임’, ‘힐링’, ‘스토리텔링’과 같이 우리말 대신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쓰는 유행어와 마케팅 용어가 더 는다. 영어는 외국과 교류가 잦은 기업 및 학계에서 수입하여 언론 매체를 거쳐 공무 영역의 낱말로 자리 잡는다. 과거에는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서 한자어를 밀어내고 대신 들어선다. 법률이나 세무처럼 우리나라 안에서 주로 돌아가는 영역에는 어려운 일본식 한자어가 많다.

2. 문자 표기
1980년대 후반부터 10여 년에 걸쳐 국한문 혼용에서 한글 전용으로 바뀌었다. 국민이 주도한 문자혁명이었다. 하지만 세계화와 함께 영어가 강조되고 생활에 사용하는 영어 낱말이 늘면서 영어를 로마자로 적는 일이 늘었다. 2005년 국어기본법을 제정하여 공문서에서 한글 전용 원칙(14조 1항)을 정하였지만, 공문서에서 로마자를 사용하는 비율은 높아진다. 국한문 혼용과 한자 병기를 주장하는 반동적인 요구도 만만치 않아 교육부는 2018년부터 초등교과서에도 한자를 병기하겠다는 방침을 검토하고 있다.

3. 이야기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서 시민 서로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말보다 무시하고 공격하고 증오하는 말이 늘고 있다. 논리적인 대화를 꺼리고 대중매체의 언어를 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청소년의 욕설, 획일적인 언어 사용 습관도 두드러진다.

4. 학술
교수 임용과 평가에서 영어 논문을 우대하고 대학의 국제화지수 평가에서 영어 강의를 우대하는 탓에 대학이 영어 탐구의 공간으로 변하였다. 영어에 예속된 학문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5. 언어교육
입시 변별력 때문에 읽기 위주의 국어교육으로 쏠려 말하기, 읽기, 쓰기, 듣기 능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 외국어 교육은 영어 과목에 지나치게 쏠려 있고, 입시 때문에 영어 능력을 키우는 데에도 효율이 낮다. 진학뿐만 아니라 취업과 승진 등 사회생활에서도 영어가 지나치게 선발의 잣대로 사용된다.


감성과 소통, 공생의 언어정책


1. 정책 목표
○ 모든 국민이 풍요롭고 정확하게 느낌과 생각을 주고받도록 한다.
○ 말 때문에 차별받지 않고 시민의 권리를 누리도록 한다.
○ 문화와 학술과 산업 분야에서 우리말로 국민의 지혜를 모으고 키운다.
○ 외국어 교육의 효율을 높이고 선발 잣대 기능을 줄인다.

2. 영역별 정책

○ 공무 영역
- 공무 언어 정책을 세우고 부처 및 지자체 사이의 협력과 정책 추진을 엮는 ‘국가언어위원회’를 만들어 대통령 밑에 둔다. 공무 용어 실태를 조사하여 매년 국회에 보고한다.
- ‘공문서 쉽게 쓰기’ 법안을 만들고(미국 2010, Plain Writing Act) 지침을 개발하여 보급한다. 어려운 한자어나 영어 대신 쉬운 말과 우리말을 사용하고, 공문서 한글 전용을 강화한다. 기관 평가에 반영하여 잘한 기관을 우대한다.
- 공무원의 국어소통능력을 인사에 반영하고, 공무에 필요한 국어소통능력 중심으로 공무원 선발 시험을 개선한다.
- 상급자부터 국어소통능력을 키우는 교육을 꾸준히 벌인다.
- 분야별 전문용어를 표준화하고 전문용어 가운데 생활용어로 들어와 힘을 떨칠 말을 골라 우리말로 바꾸는 체계를 만든다.(전문용어위원회와 국가언어위원회 연계)
- 공무 언어를 감시하고 개선을 권고하는 민간 위원회를 운영한다.

○ 학술 영역
- 대한민국 학술원 인원을 보강하여 우리말 학술용어 개발을 추진하고, 정부의 전문용어 다듬기를 지원한다.
- 대학 평가 사항에서 영어 강의 항목을 없앤다.
- 국공립대 교수 임용 및 평가에서 영어 능력과 영어 저술 업적을 우대하지 않는다.
- 국공립대의 영어 강의는 강사 자율에 맡기되 우대하지 못하도록 한다.
- 한국연구재단의 연구 지원 사업이나 학술지 평가에서 학술원과 전문용어위원회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글쓰기를 의무화한다.
- 모든 학회의 학술용어 다듬기 사업을 지원한다.

○ 교육 영역
- 읽기 위주의 국어교육을 개선한다. 말하기와 쓰기, 듣기 교육을 강화한다.
-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교육과정의 분량을 줄이고 독서와 토론을 보강한다.
- 대입 영어 시험의 비중을 대폭 낮추고 독해 위주의 영어 수업을 개선하여 말하기와 쓰기, 듣기 능력과 균형을 맞춘다.
- 초등 3~4학년 주 1시간, 5~6학년 주 2시간의 영어 수업을 통합하여 초등 6학년에서 주 5시간으로 집중 교육한다.
- 장기적으로 영어와 제2 외국어 사이의 지위 격차를 줄인다.

○ 시민 영역
- 기업의 임직원 독서 진흥을 유도할 지원, 우대 정책을 마련한다.
- 중년, 노년 세대의 문해 능력을 높이기 위해 독서 진흥 방안을 마련한다.
- 방송언어 시민감시 활동을 지원한다.
키워드 / 태그 : 언어정책,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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