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타결된 관세협상이나 핵추진 잠수함 연료 승인 등의 실질적 영향력을 가늠하기 위해선 꽤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한미정상회담 자체는 무난히 진행됐고 이 대통령도 안정감을 보였다. 무엇보다 핵추진 잠수함에 대한 이 대통령의 제안을 트럼프 대통령이 수락한 것은 상당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됐다.
연달아 진행된 한일, 한중 정상회담도 마찬가지다.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일본 총리와 이재명 대통령 사이엔 정치이념적 차이가 꽤 크다는 평가가 많지만 두 사람 다 실용적 자세로 회담에 임했고 셔틀외교 재개 기조를 재확인했다. 오랜만에 진행된 한중 정상회담 역시, 그 직전 핵추진 잠수함 뉴스에도 불구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도출됐다. 북핵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다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APEC계기 정상회담에서 중국 측이 북한에 대한 압박으로 보이는 발언을 내놓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APEC회의에서 실용적인 면모와 안정감을 함께 보인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제고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체 정국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무엇보다 여당에 대한 장악력 내지 영향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핵추진 잠수함 이슈의 부각, 트럼프-김정은 깜짝 회동 불발은 이른바 동맹파를 압박하는 자주파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효과가 있을 것이며 전반적으로 여권 지지자들이 대통령의 ‘실용 기조’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APEC이 폐막한 직후 지난 일요일 오전 민주당이 이른바 (대통령에 대한) 재판중지법을 '국정안정법', '국정보호법', '헌법 84조 수호법'으로 호칭해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 법이 옳나 그르냐의 차원도 중요한 논점이지만 대통령의 이미지가 제고되고 국익, 통합, 실용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더 연장시켜야할 시점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납득하기 힘든 것. 이는 APEC에 가려져 있던 대장동 1심 재판 선고 결과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사법 개혁 vs 장악 논점을 급히 재점화하는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대통령과 당의 역할 분담인진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 사안은 이 대통령 이슈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한편 이번 APEC에서 대중적 주목을 가장 강하게 받은 사람은 젠슨 황 엔비디아 CEO였다. 깐부치킨 치맥, 고 이건희 회장의 편지 소개, PC방과 게이머에 대한 상찬 등 한국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를 과시하며 GPU 26만장 우선 공급이라는 큰 뉴스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한 이재용 삼성 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 등의 소탈한 이미지와 엔비디아 AI 동맹으로서의 기업 위상도 함께 제고됐다. APEC CEO서밋 뿐 아니라 여러 살림살이를 챙긴 최태원 대한상의회장이나 거제조선소에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를 장영실함(잠수함)에 태운 김동관 한화 부회장 등도 마찬가지.
국익과 기업 이익의 교집합을 극대화하는 속에서 기업인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한 과거 1, 2세 기업인들과 달리 3세 기업인들이 대중적 접점 속에서 PI를 강화하는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전반적으로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는 것과 함께 기업인들에 대한 호감이 높아지는 흐름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인기’는 법적, 제도적 차원을 뛰어넘어 정서적 차원의 책임도 가중시키게 되는 양날의 칼임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