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여당은 정무적 기획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것처럼 보인다. 선임 최고위원과 민생특위를 맡은 최고위원이 메시지 문제로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고 원내에 있는 다른 최고위원(태영호) 역시 ‘소신’을 앞세우며 아슬아슬한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청년’으로 분류되는 두 최고위원이 참석한 노동 시간 관련 행사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
당 대표는 전광훈 목사 이슈를 오히려 확전시키는 느낌이고 원내대표는 숨을 고르는지 아직 존재감이 없다. 다른 주요 당직자들도 제대로 된 스피커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다. 당의 얼굴과 입에 다양성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투입할 구원투수가 없는 것. 또한 경제, 외교안보, 사회복지 등 정책분야에서 전문성과 상징성을 갖춘 인물도 라인업에 들어있지 않은 상황이다. 100여 명이 넘는 의원을 비롯한 여당의 인력풀이 원래 협소하다곤 할 수 없을 것이지만, 전당대회 등을 거치며 스스로 좁혀놓은 것.
인적 쇄신하기엔 전당대회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문제점을 인정하고 궤도를 수정하기엔 책임론이 대통령실까지 확산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김기현 대표는 박정희 대통령기념관을 찾고, 박근혜 전 대통령 예방 일정을 협의하는 등의 행보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민주당의 이정근 게이트가 전당대회 돈 봉투 이슈로 확산된 만큼 금주에는 야당을 향한 집중 공격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예측 가능한 수순이다. 너무나 예측 가능한 수순들이다. 홍준표 대구 시장을 당 상임고문직에서 해촉한 것이 유일한 ‘칼 대기’일 뿐.
상식선의 행보 이상의 혁신을 자꾸 미루면 여당의 내상은 더 깊어질 가능성이 크다. 야당의 문제에 의한 반사이익이 나타날 가능성은 적지 않지만, 메시지의 수준이나 메신저에 대한 신뢰가 제고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의 좋지 않은 상황 역시 반전될 기미가 잘 안 보인다. 의혹의 당사자인 미국도 도청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지 않던 상황에서 우리 당국자가 먼저 ‘위조’를 주장하고 언론과 야당을 비난한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정보전과 외교 상황의 현실에 대한 국민들이 이해가 높은 편이고, 얼마 전까지 정권을 운영한 야당이 ‘반미 프레임’을 걱정하고 있으므로 조심스러운 메시지를 내놓았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흘러가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도청된 것으로 알려진 문건에는 우리 당국자들이 엄중한 국제정세 속에서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더구나 얼마 전에는 미군 병사가 유출 용의자로 체포된 상황이다.
게다가 대통령실의 메시지, 인사, 일정 등을 보면 분위기의 큰 변화가 나타날 것 같지도 않다. 지지율 급락에 대해선 여론조사 기관의 신뢰성에 의문을 표시하는 메시지가 나왔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심야에 의전비서관 임명, 부대변인 사퇴 등 인사 발표를 한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영부인의 공개 일정이 늘어나고 전속 사진사가 촬영해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업로드하는 영부인의 사진도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정면돌파’ 기조를 분명히 하는 것은 여당이나 대통령실이 마찬가지인 것.
국민들이나 지지자들이 느끼는 문제의식을 여권 핵심부가 공감하거나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에 가장 심각한 문제다.
지난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을 만난 야당은 당대표의 사법리스크에 직전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더하면서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 당대표의 사법리스크는 본인과 측근에 국한된 것이라면 이번 사안은 당 중진과 현역 의원, 당에서 잔뼈가 굵은 당료 출신들이 대거 연루되어 있다. 게다가 전화 녹음 파일 등이 워낙에 생생하고 발화자 격인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이 1심에서 구형보다 더 높은 형량을 선고받았다. 검찰의 정치적 공작으로만 치부하다간 더 거센 역풍이 불 것이 분명하다.
무당층이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야 및 정치권 전반에 대한 혐오는 선거제도 논의와 이른바 제3세력의 움직임에도 연동될 것이다. 하지만 정치 불신이 제도개혁이나 새로운 움직임에 꼭 긍정적 동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난타전 속에서 존재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